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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 심보선  [나의 서재]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그대는 다시 묻는다, 이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왜 계속 바라보냐고, 나는 다시 답한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그대는 내 어깨 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요, 당신은 멀쩡히 깨어 있어요, 너무 오랜 고독이 당신의 얼굴 위에 꿈꾸는 표정을 조각해놓았을 뿐

 이 밤에 열에 하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열에 하나는 무척 외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열에 하나는 흐느껴 울기도 한다, 이 밤에 그대와 내가 이별할 확률(=0.1×0.1×0.1)을 떠올리면 내 얼굴은 저 높이 까마득한 어둠 속 백동전으로 박힌 달 표면처럼 창백해진다, 나는 다만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시간의 완곡한 안쪽에 웅크리고 누워 잠들고 싶은데, 지금 나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잊고 번민으로 오로지 번민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병든 개와 모든 풋내기가 그러하듯 나는 운명 앞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대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으나 내 심장은 환희를 거절하고 우울한 예감만을 가슴 복판에 맹렬히 망치질 하였다, 우연이란 운명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순간 같은 것, 그 순간에 그대와 나는 또 다른 운명으로 만났다, 그러나 운명과 우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서로의 목전에서 모래알처럼 산지사방 흩어지고 있는데

 그대에게서 밤안개의 비린 향이 난다, 그대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 어둠 속 내륙의 습지를 돌아와 내 눈동자에 이르나 보다,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가여운 책 한 권 같군요, 나는 수치심에 젖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 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눈을 떴을 때 그대는 떠났는가, 떠나고 없는 그대여, 나는 다시 오랜 습관을 반복하듯 그대의 부재로 한층 깊어진 눈앞의 어둠을 응시한다, 순서대로라면, 흐느껴 울 차례이리라

– 심보선,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
2010/11/06 01:21 2010/11/06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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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moth on 2010/11/06 01:21
(6) comments



    제 이해력이 부족합니다. 무엇 때문에 외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최익필 2010/11/07 02:49 r x
      뭐 딱히 해답이 있겠습니까; 그저 "자신의 삶과 연관 지어 내면화" 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lunamoth 2010/11/10 18:36 x
    만담로그 타고 들어온 블로그에서 심보선을 만나다니!
    눈물나게 반갑네요ㅠㅠ

    giselle 2011/01/19 11:37 r x
      아 예 안녕하세요. giselle님 심보선님 좋아하시나보군요. 저는 김영하님 파드캐스트에서 알게됐는데, 시집 읽어보니 좋더군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 옮겨봤습니다. :)

               lunamoth 2011/01/19 11:41 x
      네, 심보선의 시를 많이 좋아합니다. 2008년에 나온 시집을 2010년 여름에 알게 됐는데 너무 좋아서 안타까울 정도였어요.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읽은 사람들이 대부분 좋아했는데, 가장 좋은 시는 각각 다 다르게 꼽네요. 저는 '식후에 이별하다'가 가장 좋았어요. 무튼, 반갑습니다 : )

               giselle 2011/01/19 11:56 x
      예 그 시도 좋네요.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예 반갑습니다 ^^

               lunamoth 2011/01/19 12:01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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