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 우리는 국왕의 말대로 여기서 생을 마쳐야 할지도 모르오. 바다 건너에서의 삶을 빨리 잊는 것이 새 삶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소? 우리가 평생토록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뿐이오. 어제를 그리워하고 내일을 두려워하는 사이 오늘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있소.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움켜쥐시오."
– 김경욱, 『천년의 왕국』, 문학과지성사, 2007, p. 252.
그렇다고 소설을 읽으며 늑대와 함께 춤을, 라스트 사무라이를 떠올린 것은 아닐진대, 책장을 덮는 순간만은 그 헛헛한 기운이 엇비슷하게 감도는 듯싶습니다. 소설로써 재구성될 수밖에 없는 한 이방인의 지난하고도, 처연하고도, 지순하게 느껴지는 이역만리 표착 생활이 참으로 아련하고 애틋하게 그려집니다. Jan Jansz. Weltevree 와 박연 그 두 이름을 가진 자의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방인의 눈을 빌려 말하는 우리네 전형성 (이란 것을 부여할 수 있다면) 에 대한 거친 초상화이기도 합니다. "격렬하게 약동하는 모순", "시적인 몽환에 사로잡힌", "습관적인 슬픔"… 다만 아쉬운 것은 숨 막힐 듯이 대구를 이루는 아포리즘의 향연 같은 수식들입니다. 의고체에 적응을 하기 전에 마치 주인공 일행의 유폐된 처지가 된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고 할까요. 김경욱의 "현대소설"을 생각해서였을까요? 하멜을 이야기하는 그의 단편 「나가사키여 안녕」을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J